삼국지 인물사전 - 진무(陳武) 진무(陳武, ? ~ 215년)는 중국 후한 말의 무장(武將)으로 자는 자열(子烈)이며 양주 여강군(廬江郡) 송자현(松滋縣) 사람이다. 진수(陳脩)와 진표(陳表)의 아버지이다. 생애 손책(孫策)이 수춘에 있을 시절에 손책은 아버지가 죽을 때까지는 양주 여강군 서현에 살다가 아버지를 장사(葬事)하고 흥평 원년(194년)에 비로소 원술(袁術)을 섬겼으며 또 흥평 원년에 원술의 명령을 받고 양쯔강(揚子江)을 동쪽으로 건너 양주자사 유요 등 원술을 따르지 않는 세력(勢力)들을 쳤고 이후 다시 수춘으로 돌아오지 않았으므로 이때는 194년으로 추측(推測)된다. 손책을 찾아가 스스로 그 가신(家臣)이 되었는데 당시 18세였으며 신장(身長)이 7척 7촌에 달했다. 이후 손책을 따라 양쯔강..
삼국지 인물사전 - 주태(周泰) 주태(周泰, ? ~ 229년)는 중국 후한 말의 무장(武將)으로 자는 유평(幼平)이며 양주(揚州) 구강군(九江郡) 하채현(下蔡縣) 사람이다. 손권(孫權)이 나중에 주태의 공을 치하하며 한 말에 따르면 출신이 한미(寒微)했다. 생애 처음에 장흠(蔣欽)과 함께 손책(孫策)의 측근이 되었다. 손책이 회계태수 왕랑을 무찌르고 회계군을 점유(占有)하면서 별부사마가 되어 병사를 받았다. 손권(孫權)과 주태가 처음 조우했는데 손권이 주태(周泰)의 풍채를 마음에 들어하여 형에게 주태를 달라고 요청(要請)했다. 손책이 육현(六縣)의 반란을 토벌하러 간 차에 주태는 손권과 함께 천 명이 되지 않는 병사를 이끌고 선성(宣城)을 지키다가 방어 태세가 완료되지 않은 상태에서 산월 수천 명의 갑작..
삼국지 인물사전 - 장흠(蔣欽) 장흠(蔣欽, ? ~ 219년)은 중국 후한 말의 무장(武將)으로 자(字)는 공혁(公奕)이며 양주(揚州) 구강군(九江郡) 수춘현(壽春縣) 사람이다. 생애 흥평(興平) 원년(194년), 손책(孫策)이 원술(袁術)에게 의탁하고 있을 무렵에 손책(孫策)의 측근이 되었고 흥평 2년(195년), 손책이 강동(江東)으로 진출할 때 별부사마(別部司馬)로 임명되어 병사를 받았고 손책의 측근이였던 주태(周泰)와 함께 손책을 따라 단양, 오, 회계 3군을 평정하는 데 공을 세웠으며 예장 공격에도 참가했다. 갈양위(葛陽尉)가 된 뒤로 세 현의 장을 역임(歷任)하여 도둑을 잡았고 서부도위로 승진(昇進)했다. 동야에서 여합(呂合)과 진랑(秦狼) 등이 손씨에 복종하지 않고 반란을 일으키자 이들을 토..
삼국지 인물사전 - 한당(韓當) 한당(韓當, ? ~ 227년)은 중국 후한 말 ~ 삼국시대 오(吳)나라의 장수로, 자는 의공(義公)이며 유주(幽州) 요서군(遼西郡) 영지현(令支縣) 사람이다. 생애 활쏘기와 말 타기에 뛰어나고 체력(體力)도 있는데다가 병사들을 유난히 아끼고 사랑해서 손견에게 총애(寵愛)를 받고 부하들 역시 한당(韓當)을 믿고 따랐다. 그는 손견(孫堅)을 수행하여 정벌 나가 각지를 다녔다. 자주 위험하고 어려운 곳에 임하여 적을 격파시키고 포로(捕虜)를 잡아 별부사마(別府司馬)로 임명되었다. 손책(孫策)이 강동을 건넜을 때 세군을 토벌하는 데 참가하여 선등교위(先登校尉)로 승진하고 병사 2천명과 기마 50필을 받았다. 그는 유훈을 정벌하는데도 참가했으며 황조를 격파하고 돌아올 때 파양(鄱陽..
삼국지 인물사전 - 황개(黃蓋) 황개(黃蓋)는 중국 후한 말의 무장(武將)으로 자는 공복(公覆)이며 영릉군 천릉현 사람이다. 생애 처음에는 영릉군의 군리로 있었다. 이후 자신을 초빙(招聘)하려는 지방관에게 찾아가려고 했으나 난을 일으킨 도적패들에게 막혀서 못가고 있었다. 그 난을 일으킨 무리를 손견(孫堅)이 격파하자 그 때 손견을 처음 만나게 되었으며 이후 손견이 의병(義兵)을 일으키자 이를 따라갔다. 손견이 죽은 후 손책(孫策)과 손권(孫權)을 따랐다. 당시 산월이 복종하지 않고 도적으로 어려움을 겪는 현이 있었으므로 황개(黃蓋)는 그 곳의 수장이 되었다. 석성현에 현리 둘을 임명했는데 부정부패가 심하였으므로 둘을 주살(誅殺)했고 춘곡현장, 심양현령으로 전임되었다. 모두 아홉 현을 지켰는데 가는 곳마다..
삼국지 인물사전 - 정보(程普) 정보(程普)는 중국 후한 말의 무장(武將)으로 자는 덕모(德謨)이며 유주(幽州) 우북평군(右北平郡) 토은현(土垠縣) 사람이다. 행적 본래는 지방의 하급 관리로 손견(孫堅)이 하비승일 때 그의 부하로 처음 들어왔으며 그것을 계기(契機)로 평생 손씨 일족을 섬겼다. 손견을 따라 황건적(黃巾賊)의 난을 진압했고 양인 전투에 참전해 동탁(董卓)을 격파하고 부상을 입었다. 정보(程普)는 “여정 장수들 중 가장 먼저 나와서 정보의 나이가 제일 많았기에 당시 사람들을 모두 정공(程公)이라 불렀다.”고 한다. 그러므로 황개, 한당, 조무보다도 나이가 많았을 것이다. 손견이 죽은 후 손책(孫策)을 따랐다. 손책이 원술(袁術)의 명령을 받아 여강(廬江)을 함락하는 데에 종군했으며 손책이 장..
삼국지 인물사전 - 등애(鄧艾) 등애(鄧艾, ? ~ 264년)는 중국 삼국시대 위나라의 장군(將軍)이며 자는 사재(士載)로 의양군(義陽郡) 극양현(棘陽縣) 사람이다. 생애 생애 전반기 : 등애(鄧艾)는 부모를 일찍 잃고 여남(汝南)에서 송아지를 길렀다. 지형을 살피고 그림을 그리면서 군사작전에 적합(適合)한지를 연구하기를 좋아했으나 말더듬이여서 주위 사람들의 비웃음을 받았다. 이후 상계리(上計吏)를 지낼 때 사마의(司馬懿)를 만나 상서령(尙書令)이 되었다. 이후 수춘(壽春)을 시찰하던 등애(鄧艾)는 운하를 통해 물을 끌어들일 구상(構想)을 하고 '제하론(濟河論)'을 지어 사마의에게 바쳤다. 이것이 받아들여져 운하가 완성된 후 수해(水害)가 줄고 군사들과 식량을 보내기가 편리해졌다. 조모(曹髦)가 등극한 ..
삼국지 인물사전 - 하후돈(夏侯惇) 하후돈(夏侯惇, ? ~ 220년)은 중국 후한 말 ~ 삼국시대 위나라의 무장(武將)으로 자는 원양(元讓)이다. 조조(曹操)의 거병에 참여하여 수많은 전투를 치렀으며 전투 도중 한쪽 눈에 화살이 박히자 그 화살을 뽑아 눈알을 삼켰다는 일화(逸話)로 유명하다. 초한지((楚漢志))에 등장하는 유방(劉邦)의 부하 하후영(夏侯嬰)의 후손이다. 생애 패국(沛國) 초현(譙縣)에서 태어났으며 전한 명장 하후영의 후예로, 조조(曹操)의 신하 하후연의 동고조(同高祖) 팔촌 형이며 조조에게는 이종사촌 동생이 된다. 그러나 일설(一說)에는 조조의 아버지 조숭(曹嵩)의 친조카, 즉 조조의 친가 사촌 형제라는 설도 있다. 조숭의 집안은 본래 하후씨로 환관인 조등의 양자가 되었다. 등용 14살 ..
삼국지 인물사전 - 허저(許褚) 허저(許褚)는 후한 ~ 위나라의 무장(武將)으로 자는 중강(仲康)이며 예주 초국(譙國) 초현(譙縣) 사람이다. 호치(虎癡)란 별명이 있다. 우월한 완력(腕力)과 우직한 성품으로 조조의 신임(信任)을 받아 그 경호(警護)를 맡았으며 용맹을 떨쳤다. 생애 괴력의 사내 : 후한 말 수천 명으로 자경단(自警團)을 조직해 도적을 방비(防備)했다. 여남군(汝南郡) 갈피(葛陂)의 도적 1만여 명이 쳐들어오니 비록 수는 적었지만 극한(極限)에 다다를 때까지 사력을 다해 싸웠다. 화살이 떨어졌어도 돌을 던지며 저항(抵抗)하니 도적이 감히 접근하지 못했다. 식량마저 동나자 일단 강화(强化)하고 소를 주는 대신 먹을 것을 받기로 했다. 도적(盜賊)이 와서 소를 몰고 가려 했는데 자꾸 도망치는..
삼국지 인물사전 - 조인(曹仁) 조인(曹仁, 168년 ~ 223년)은 중국 삼국 시대 위(魏)나라의 장군(將軍)으로 자는 자효(子孝)이며 예주(豫州) 패국(沛國) 초현(譙縣) 사람이다. 영천태수(潁川太守) 조포(曹褒)의 손자이자 장수교위(長水校尉) 조치(曹熾)의 아들이며 조조(曹操)의 사촌동생이다. 일생 궁술, 마술, 수렵을 좋아해서 190년에 조조(曹操)가 군사를 일으켰을 때에 천 명의 군사를 거느려서 조조의 부하로 들어왔다. 그 이후에 조조 아래에서 행봉교위(厲鋒校尉)로서 대도겸전, 대원술전, 관도전투(官渡戰鬪) 등에서 활약한다. 209년의 남군 공방전(攻防戰)에서는 오의 주유(周瑜)가 인솔하는 6천기의 군대와 싸워서 궁지(窮地)에 빠진 부장 우금(牛金)을 구했다. 이후에도 마초(馬超) 토벌전에 따른..
삼국지 인물사전 - 육항(陸抗) 육항(陸抗, 226년 ~ 274년)은 중국 삼국시대 오나라의 장수(將帥)로 자는 유절(幼節)이며 육손(陸遜)의 둘째 아들이고 손책(孫策)의 외손자다. 쓰러져 가던 오나라 말기에 최후의 명장이라 칭송(稱頌)받는다. 생애 초기 행적 : 적오 8년(245년), 육손이 죽었을 때 20살이었으며 형 육연(陸延)은 요절(夭折)했으므로 건무교위(建武校尉)에 임명되며 아버지 육손이 남긴 병사 5천 명을 통솔(統率)하게 된다. 손권(孫權)은 양축(楊竺)이 육손을 모함한 20가지 일을 육항(陸抗)에게 힐문하고 빈객을 금했다. 그러나 육항은 일마다 조리 있게 대답하여 손권은 점차 의혹(疑惑)을 떨쳐내었다. 동 9년(246년), 입절중랑장이 되어 제갈각(諸葛恪)과 함께 시상에 주둔(駐屯)했다...
삼국지 인물사전 - 손책(孫策) 오 장사환왕 손책(吳 長沙桓王 孫策, 175년 ~ 200년 4월)은 중국 후한 말의 군벌이자 오(吳)나라의 추존왕으로 198년 조조에 의해 오후에 봉(封)해졌다. 자는 백부(伯符)이며 양주(揚州) 오군(吳郡) 부춘현(富春縣) 사람이다. 손견(孫堅)의 장남이자 오 대제 손권(孫權)의 형이다. 손견 사후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도 강동의 호걸들을 불러모아 강동(江東)을 정벌하여 오나라의 기반을 닦아 소패왕이라 불렸으며 198년 조조와 원술(袁術)과의 교전 중 조조를 도와 그의 천거로 토역장군(討逆將軍)의 칭호와 함께 오후(吳侯)의 작위를 받았다. 나중에 손권이 동오의 황제가 되자 장사환왕(長沙桓王)에 추존하였다. 생애 초반 "삼국지" 손파로토역전에 따르면 손견(孫堅)이 처음 의병..
삼국지 인물사전 - 손견(孫堅) 오 시조 무열황제 손견(吳 始祖 武烈皇帝 孫堅, 156년 ~ 192년 1월 7일)은 중국 후한 말의 무장(武將)이자 동오의 추존황제(推尊皇帝)로 자는 문대(文臺)이며 양주(揚州) 오군(吳郡) 부춘현(富春縣) 사람이다. 손종(孫鍾)의 차남이며 손책(孫策), 손권(孫權)의 아버지로 묘호는 시조(始祖)며 시호는 무열황제(武烈皇帝)다. 생애 생애 초반 : 출신에 대해선 춘추 시대(春秋時代)의 명장 손자의 후손일 것이라고도 한다. 17세 때 전당에서 약탈(掠奪)을 일삼던 해적을 죽여 유명해졌다. 회계에서 허창(許昌)이 난을 일으켜 스스로 양명황제(陽名皇帝)라 칭하자 손견은 군사마로서 정병을 모아 주·군의 군사와 함께 허창을 토벌(討伐)했다. 이로 인해 염독승이 되었고 다시 우이승,..
삼국지 인물사전 - 서황(徐晃) 서황(徐晃, ? ~ 227년)은 중국 후한 말 ~ 삼국 시대 위나라의 장수로 자(字)는 공명(公明)이며 하동군(河東郡) 양현(楊縣) 사람이다. 서개(徐蓋)의 아버지이며 서패(徐覇)의 조부이다. 생애 처음 이각(李傕)의 부하 양봉(楊奉)을 섬기며 공적을 세워 기도위(騎都尉)에 임명되었다. 서황은 양봉에게 헌제(獻帝)를 데리고 낙양(洛陽)으로 돌아갈 것을 진언(進言)하였고 양봉은 서황의 생각에 따라 헌제(獻帝)를 데리고 낙양으로 돌아왔다. 서황은 이 일로 도정후(都亭侯)에 봉해지게 된다. 양봉에게 조조(曹操)에게 귀순할 것을 진언했고 양봉은 이를 받아들였으나 조조가 허로 천도하자 실망하여 조조와 대립(對立)했다가 본진인 양(梁)의 진영이 함락당해 원술(袁術)에게로 망명했다. ..
삼국지 인물사전 - 장합(張郃) 장합(張郃, ? ~ 231년)은 중국 후한 말 ~ 삼국시대 위(魏)나라의 무장(武將)으로 자는 준예(儁乂)이며 기주(冀州) 하간국(河間國) 막현(鄚縣) 사람이다. 생애 원소의 수하시절 : 젊은 시절에 황건적(黃巾賊)의 난에서 반란군 진압의 모병(募兵)에 응하여 한복(韓馥)의 휘하에서 활약하였다. 한복의 몰락 후에는 원소(袁紹)을 섬겨 교위(校尉)에 임명되었다. 공손찬(公孫瓚)과의 싸움 등에서 활약한 공적으로 영국중랑장(寧國中郞將)까지 출세하였다. 200년 관도대전(官渡)의 오소(烏巢) 공방전에서 조조(曹操)의 군세는 강하므로 오소를 지키는 순우경(淳于瓊)에게 원군을 보내야 한다고 원소(袁紹)에게 진언하였으나 동료인 곽도(郭圖)는 반대하며 조조의 본진을 공격(攻擊)하는 것이..
삼국지 인물사전 - 우금(于禁) 우금(于禁, ? ~ 221년)은 중국 삼국 시대의 위나라의 무장(武將)으로 자는 문칙(文則)이며 연주(兗州) 태산군(泰山郡) 거평현(鉅平縣) 사람이다. 위나라 오장군(五將軍)의 한 명이다. 생애 처음에는 포신(鮑信)을 섬겼다. 포신이 전사하자 장군 왕랑(王朗)의 휘하에 있다가 조조(曹操)에게 우금이 대장군을 맡을 능력이 된다고 추천(推薦)하여 조조의 부하가 된다. 이후 조조를 수행하여 여포(呂布), 장초(張超)를 공격하여 연주 탈환에 공을 세웠고 황건 잔당인 황소(黃巢), 유벽(劉辟)을 격파했고 진국을 침공한 원술의 교유를 포함한 4명의 장수를 붙잡아 참수하였다. 건안(建安) 2년(197년), 장수(張繡)가 항복했다가 반란을 일으켰을 때 하후돈(夏侯惇)(夏侯惇)이 거느린 ..
삼국지 인물사전 - 악진(樂進) 악진(樂進, ? ~ 218년)은 중국 후한 말의 무장(武將)으로 자(字)는 문겸(文謙)이며, 양평(陽平) 위국(衛國) 사람이다. 생애 조조(曺操)를 섬겼다. 담력(膽力)으로써 조조를 따라 장하리(帳下吏)가 되었다. 출신 군으로 보내져 천여 명을 모병(募兵)하여 돌아온 후 군가사마, 함진도위가 되었다. 조조가 여포(呂布), 장초(張超), 교유(橋蕤), 장수, 수고(眭固), 유비(劉備) 등을 공격할 때 항상 선두에 서서 공을 세웠으므로 광창정후(廣昌亭侯)로 봉해지고 토구교위(討寇校尉)에 임명되었다. 조조가 여포(呂布), 장초(張超), 교유(橋蕤), 장수, 휴고(眭固), 유비(劉備) 등을 공격할 때 항상 선두에 서서 공을 세웠으므로 광창정후(廣昌亭侯)로 봉해지고 토구교위(討寇校..
삼국지 인물사전 - 장료(張遼) 장료(張遼, 169년? 170년? 171년? ~ 222년)는 중국 후한 말 ~ 삼국시대(三國時代) 위(魏)나라의 장수로 자는 문원(文遠)이며 병주(幷州) 안문군(雁門郡) 마읍현(馬邑縣) 사람이다. 생애 장료의 선조(先祖)는 전한의 섭일(聶壹)로 섭일이 흉노(匈奴)를 해치려 했던 일 때문에 원수(怨讎)를 피하여 성씨를 고쳤다. 젊어서 군리가 되었으며 병주자사 정원(丁原)이 종사로 삼아 군을 이끌고 수도로 가게 했다. 대장군 하진(何進)은 장료를 하북으로 보내 병사 천 명을 모았다. 그러나 돌아왔을 때에는 하진이 십상시에게 암살(暗殺)당하고 정국이 혼미한 틈을 타 동탁(董卓)이 조정과 중앙군을 장악한 상태여서 장료도 동탁(董卓)에게 속했다. 동탁이 패망한 후 여포(呂布)를 좇..
삼국지 인물사전 - 조운(趙雲) 조운(趙雲, ? ~ 229년 11월)은 중국 후한 말 ~ 중국 삼국시대 촉한(蜀漢)의 무장으로, 자는 자룡(子龍)이며 기주(冀州) 상산군(常山郡) 진정현(眞定縣) 사람이다. 생애 초반 조운은 처음에 원소(袁紹)에게 졸백(卒伯-병졸의 우두머리)으로 임관하였으나 원소의 그릇이 크지 않다는 것을 일찌감치 간파(看破)하여 공손찬(公孫瓚) 아래로 들어갔다. 소설 삼국지평화(三國志平話), 삼국지연의(三國志演義)에서는 창술(槍術)의 명수로 등장(登場)하며 처음에는 원소의 부하였으나 스스로 공손찬 밑으로 달려가고 문추(文醜)를 상대하여 공손찬(公孫瓚)을 궁지에서 구하는 장면에서 처음 등장한다. 유비와의 만남 그 무렵 유비(劉備) 또한 공손찬(公孫瓚) 밑에 몸을 의지하고 있었다. 공손찬이..
삼국지 인물사전 - 황충(黃忠) 황충(黃忠, ? ~ 220년)은 후한 말의 무장(武將)으로 자는 한승(漢升)이며 형주(荊州) 남양군(南陽郡) 사람이다. 생애 형주목(荊州牧) 유표(劉表)가 그를 중랑장(中郞將)으로 삼아 유반(劉磐)과 함께 유현(攸縣)을 수비하게 했다. 조조(曹操)가 형주를 점령하자 임시로 비장군(裨將軍) 직을 대행하게 하니 예전 임무에 종사(從事)하며 장사태수(長沙太守) 한현(韓玄)에 속하게 되었다. 유비(劉備)가 남쪽으로 여러 군(郡)을 평정하자 황충(黃忠)이 마침내 몸을 맡기기로 하고는 그를 수행해 촉(蜀)으로 들어갔다. 가맹(葭萌)에서 임무를 받아 군대를 돌려 유장(劉璋)을 공격하니 황충은 늘 앞장서서 적진에 올라 함락(陷落)시켰고 용맹하고 굳셈이 삼군(三軍)의 으뜸이었다. 익주(益..
삼국지 인물사전 - 마초(馬超) 마초(馬超, 175년 ~ 222년)는 중국 후한 말기의 군벌(軍閥)이며 삼국시대 촉한의 무장이다. 자는 맹기(孟起)이다. 관우(關羽), 장비(張飛), 황충(黃忠), 조운(趙雲)과 더불어 오호대장군(五虎大將軍)으로 불렸다. 생애 마초는 192년(초평 3년) 마등과 한수(韓遂)가 군대를 이끌고 장안(長安)으로 진입하자 한 왕조는 한수를 진서장군(鎭西將軍)에 임명해 금성으로 귀환(歸還)시키고 마등을 정서장군에 임명해 미에 주둔시킨다. 192년 한수(韓遂,와 마등(馬騰)이 서로 불화해지자 군을 이끌고 대립(對立)하였다. 이때 마초와 염행(閻行)이 1대1로 붙어 마초가 크게 패하고 죽기직전까지 패하였다. 사례교위 종요(鍾繇)가 관중으로 부임해 한수와 마등에게 서신을 보내 복종하는 ..
삼국지 인물사전 - 장비(張飛) 장비(張飛, 165년 ~ 221년 6월)는 후한 말 ~ 촉한의 군인으로, 자는 익덕(益德)이며 유주(幽州) 탁군(涿郡) 사람이다. 유비(劉備), 관우(關羽)와 함께 황건적(黃巾賊) 토벌에 나서며 이름을 떨치기 시작했다. 장판교에서 기지를 발휘해서 조조(曹操)의 대군을 막았으며 서촉정벌 시 엄안(嚴顔)을 회유하여 파촉정벌(巴蜀征伐)에 큰 공로를 세웠다. 이후 파서태수(巴西太守)의 자리에 올랐고 한중정벌 당시 위나라의 장합(張郃)과 맞서 싸워 승리하였다. 그러나 관우의 복수(復讎)를 위해 출정을 준비하던 도중 휘하 무장 범강(范疆)과 장달(張達)에게 암살당했다. 장남 장포(張苞)가 장비보다 (약간) 일찍 요절(夭折)하여 차남인 장소(張紹)가 가계를 이었다. 장비의 장녀와 차녀..
삼국지 인물사전 - 관우(關羽) 관우(關羽, 162년? ~ 219년 음력 12월)는 중국 후한 말의 무장으로, 자(字)는 운장(雲長)이며 본래의 자는 장생(長生)이다. 사례(司隷) 하동군(河東郡) 해현(解縣) 사람이다. 동생 장비(張飛)와 더불어 유비(劉備)를 오랫동안 섬기며 촉한(蜀漢) 건국에 지대한 공로를 세웠다. 충성심(忠誠心)과 의리, 당당한 성품으로 인해 동아시아에서 가장 잘 알려진 장수(將帥)로 손꼽히며 한대(漢代) 이후로 남송(南宋)의 악비(岳飛)가 등장하기 이전까지 각 중국사서(中國史書)에 등장하는 후세사람들은 ‘용맹한 자’ 에 대해 이야기할 때 ‘반드시’ 관우(關羽), 장비(張飛)의 경우를 들어 말하였다고 한다. 의리(義理)의 화신(化身)으로 중국의 민담(民譚)이나 민간전승(民間傳承), ..
삼국지 인물사전 - 여포 (呂布) 여포(呂布)는 중국 후한 말의 무장으로 자는 봉선(奉先)이며 병주(幷州) 오원군(五原郡) 구원현(九原縣) 사람이다. ‘마중적토 인중여포(馬中赤兎 人中呂布)’라는 말로 표상되듯 신기에 가까운 무예로 천하의 명성(名聲)을 얻었다. 동탁(董卓)의 부하였으나 왕윤(王允)과 공모하고 동탁을 죽여 왕윤 정권의 군사적 중추(中樞)에 있었으며 이각(李傕) · 곽사(郭汜) · 장제(張濟) · 번조(樊稠)와 싸워 져 왕윤 정권을 몰락(沒落)시켰다. 이후 각지를 떠돌다 서주(徐州)를 근거지로 조조(曹操)와 맞섰으나 패망(敗亡)하고 처형되었다. 여포의 생애 힘이 세고 궁마술(弓馬術)에 능숙하여 전한 무제 때의 명장(名將)인 이광(李廣)에 비유되며 비장(飛將)이라 일컬어졌다. 병주자사(幷州刺史..
삼국지 인물사전 - 동탁 (董卓) 동탁(董卓)은 중국 후한 말의 정치가이며 자는 중영(仲穎)이다. 자는 중영(仲穎)이며 양주(凉州) 농서군 임조현(臨洮縣) 사람이다. 변방에서 무공을 쌓았다. 영제(靈帝) 사후 십상시의 난 등 정치적 혼란(混亂)을 틈타 정권을 잡았다. 소제(少帝)를 폐하고 부패·살인·약탈·도굴·방화·축재 등 온갖 폭정(暴政)을 휘둘렀다. 관리들의 대규모 무장 항명사태인 반동탁 연합군과 각종 암살(暗殺) 시도가 있었고 결국 왕윤(王允)·여포(呂布)에게 죽임을 당하였다. 이후 대표적인 악인으로 두루 회자(膾炙)되었다. 생애 동탁(董卓)은 완력이 뛰어나 두 개의 궁대(弓袋)를 몸에 차고 말을 몰면서 어느 손으로도 활을 맘대로 쏠 수가 있었다고 한다. 젊어서부터 의협적(義俠的)인 무리와 함께 강..
삼국지 인물사전 - 육손(陸遜) 육손(陸遜, 183년 ~ 245년 2월)은 중국 후한 말 ~ 삼국시대 오나라(吳)의 정치가로 자는 백언(伯言)이며 양주(揚州) 오군(吳郡) 오현(吳縣) 사람이다. 촉한과 위나라의 침공을 여러 차례 격퇴(擊退)하여 오나라를 지켜냈으며 여몽(呂蒙)을 도와 관우(關羽)를 사로잡는데 공을 세웠고 이후 원한을 갚고자 침공(侵攻)한 유비군을 물리치는데 큰 역할을 하였다. 원래 이름은 육의(陸議)로 병법에 능통했고 기계(奇計)를 잘 썼다. 처음에는 유생으로 알려졌지만 웅재(雄才)와 대략(大略)을 품었었다. 편장군(偏將軍), 우도독(右都督)이 되어 여몽(呂蒙)을 대신하여 육구(陸口)에 둔병하였으며 형주(荊州)를 함락시켜 관우(關羽)를 죽게 한 것은 그의 지모(智謀)에서 나온 것이다. 뒤..
삼국지 인물사전 - 노숙(魯肅) 노숙(魯肅, 172년 ~ 217년)은 중국 후한 말의 무장이자 정치가(政治家)로 자는 자경(子敬)이며 양주(楊州) 임회군(臨淮郡) 동성현(東城縣) 사람이다. 생애 어릴 적에 아버지를 여의고 조모(祖母)와 함께 살았다. 집안이 부유(富裕)하며 사람들에게 베푸는 것을 좋아했고 돈을 풀어 가난한 자를 구휼(救恤)하고 인재들과 교제(交際)를 쌓아 고을의 환심(歡心)을 샀다. 주유(周瑜)가 거소장(居巢長; 거소현의 현장)일 때 노숙(魯肅)에게 군량을 요청하였고 노숙은 각각 3천곡의 곡식이 있는 창고 둘 중 하나를 주유에게 아주 내어 주어 이로써 주유와 친교(親交)를 쌓았다. 원술(袁術)이 불러서 동성장(東城長; 동성현의 현장)으로 삼았으나 원술의 통치에 기강이 해이해진 것을 보고 ..
삼국지 인물사전 - 주유(周瑜) 주유(周瑜, 175년 ~ 210년)는 중국 후한 말(後漢末)의 무장(武將)이며 양주(楊州) 여강군(廬江郡) 서현(舒縣) 사람으로 자는 공근(公瑾)이다. 종조부(從祖父) 주경(周景), 주경의 아들 주충(周忠)은 모두 한의 태위(太尉)를 지냈고 부친 주이(周異) 낙양현령(洛陽 縣令)을 지냈다. 주유(周瑜)는 건장하며 빼어난 자태(姿態)가 있었다. 처음 손견(孫堅)이 의병을 일으켜 동탁(董託)을 토벌하매 집을 서(舒)으로 옮겼다. 손견의 아들 손책(孫策)과 주유는 동년배로 둘의 우의(友誼)는 깊어서 주유가 길가 남쪽의 큰 집을 옮겨다 손책(孫策)에게 주고, 당위에 올라가 손책의 모친에게 절 하였다. 서로 있고 없는 바를 같이 융통(融通)하였다. 생애 청년기 초평 원년(190년)..
삼국지 인물사전 - 제갈량 (諸葛亮) 제갈량(諸葛亮, 181년 음력 7월 23일 ~ 234년 음력 8월 28일)은 중국 삼국시대 촉한의 모신(謨臣)이다. 자는 공명(孔明)이며 별호는 와룡(臥龍) 또는 복룡(伏龍)이고 후한 말 군웅(群雄)인 유비(劉備)를 도와 촉한(蜀漢)을 건국하는 제업(帝業)을 이루었다. 형주(荊州) 남부 4군을 발판으로 유비의 익천(翼千)을 도왔다. 221년 유비가 제위(諸位)에 오르자 승상(丞相)에 취임하였고 유비 사후 유선(劉禪)을 보좌하여 촉한(蜀漢)의 정치를 주장하였다. 227년부터 지속적인 북벌(北伐)을 일으켜 8년 동안 5번에 걸쳐 위(魏)나라의 옹·양주 지역을 공략(攻略)하였다. 234년 5차 북벌 중 오장원(五丈原) 진중에서 54세의 나이로 병사(病死)하였다. 중국 역사..
삼국지 인물사전 - 손권(孫權) 오태조 대황제 손권(吳太祖 大皇帝 孫權, 182년 음력 5월 18일 ~ 252년 음력 4월 16일)은 중국 삼국시대(三國時代) 오나라의 초대 황제로 자는 중모(仲謀)이며 양주(揚州) 오군(吳郡) 부춘현(富春縣) 사람이다. 손견(孫堅)의 차남으로 손책(孫策)의 동생이며. 200년에 형 손책이 급사(急死)하자 오후(吳侯)의 자리에 올라 강동(江東)을 다스렸다. 수성(守成)의 명수로 평가되고 있다. 묘호는 태조(太祖)이고 시호는 대황제(大皇帝)이다. 생애 손권(孫權)이 태어날 당시 아버지 손견(孫堅)은 갓 태어난 그의 풍모(風貌)를 보고 고귀(高貴)한 위치에 오를 상이라며 기뻐했다고 한다. 초평 3년(192년)에 아버지 손견(孫堅)이 전사하고 원술(袁術) 밑에서 몸을 의지하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