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문학작품에서 가장 유명한 병미인(病美人)인 임대옥의 병약한 이유 임대옥(林黛玉)이 병약한 것은 아주 유명하다. 중국문학작품에서 가장 유명한 병미인(病美人)이 바로 임대옥(林黛玉)이다. 그녀는 병약함으로 인하여 아리땁고 병약함으로 인하여 예쁘다. 비록 '홍루몽(紅樓夢)'의 작가는 임대옥(林黛玉)에게 선천적(先天的)인 부족함이 있어 태어나면서부터 병약(病弱)했다고 하지만 여하한 질병(疾病)도 이유가 없는 것은 없다. 임대옥(林黛玉)의 병은 후천적인 생활상황과도 상당한 관계가 있다. 임대옥(林黛玉)이 가부(賈府, 가보옥의 가씨저택)에 들어올 때 겨우 5,6살의 어린아이였으니 바로 성장발육단계(成長發育段階)였다. 그러나 가부의 생활습관은 확실히 이 어린 여자아이의 신체건강(身體健康)에 좋지 않았다. 임대옥(..
관심을 가진 사람이 많은 '홍루몽(紅樓夢)'의 영문명칭 홍루몽(紅樓夢)에 관심을 가진 사람이 많다. 우리의 홍루몽(紅樓夢)에 대한 감정은 민족감정(民族感情)이고 문화에 대한 그리움이다. 홍루몽(紅樓夢)의 번역은 아주 복잡(複雜)하고 문화전파측면의 주제이다. 단순한 기술적인 번역기법(翻譯技法)의 문제는 아니다. '홍루몽(紅樓夢)'은 중국에서 번역(飜譯)하기 가장 어려운 책의 하나이다. 우선 책이름만 하더라도 현재 3가지 영문명칭(英文名稱)이 존재한다. 1. The Story of the Stone 이것은 1973년 David Hawkes가 '홍루몽(紅樓夢)'을 번역할 때의 주명칭(主名稱)이다. 호크스가 번역해서 팽귄출판사가 출판했다. The Story of the Stone은 '석두기(石頭記)'를 정확하게..
가씨집안의 발전방향과 전략수립을 위한 가모와 가정의 전략다툼 내막 하나의 기업이 오랫동안 발전하려면 반드시 전략적(戰略的)인 사상이 있어야 한다. '손자병법(孫子兵法)'에서는 "모든 일에 미리 준비(準備)하면 이루어지고 미리 준비하지 않으면 이루어지지 않는다(凡事, 預則立, 不預則廢)"고 하였다. 사전에 발생하는 한 추세(趨勢)에 대하여 미리 판단한다는 것은 아주 어렵다. 그러나 모든 기업이 어쩔 수 없이 해야 하는 일이다. 왜냐하면 마음속으로 그렇게 믿는지 아닌지 간에 서방기업경영이론(西方企業經營理論)의 교육을 받은 중국의 당대 기업가들은 이미 깊이 알고 있다. 기업에 전략이 없을 수 없다는 것을. 그런데 전략을 만드는 것은 미래의 추세에 대하여 판단(判斷)을 내리는 것은 확실히 기업의 최고경영진(最高..
조설근은 일개 이야기꾼이지 '홍루몽'의 작자가 아니라는 견해에 대하여 '홍루몽(紅樓夢)'의 진정한 작자가 누구인가? 이제 고증(考證)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홍루몽'의 제1회에는 이런 말이 있다. "조설근(曹雪芹)이 일찌기 도홍헌(悼紅軒)에서 십년동안 피열(披閱)하면서 5번 덧붙이고 빼며(增刪) 목록을 편찬하고 장회(章回)를 나누었다." 그런데 이 '조설근(曹雪芹)'은 그저 '홍루몽'의 제1회에 나오는 허구(虛構)의 인명이다. 즉 소설가(小說家)가 하는 말일 뿐이다. 이 말이 은유하는 바가 무엇인지? 도대체 누구를 가리키는 것인지? 도대체 '홍루몽(紅樓夢)'의 창작에 어떤 공헌(貢獻)을 했는지? 이제는 알아볼 방법이 없다. 정위원(程偉元)이 '홍루몽'을 출판하면서 정갑본(程甲本), 정을본(程乙本)의 서문..
가보옥의 사랑을 받은 임대옥은 속이 좁고 병적이고 의심이 많은 미녀이다 만일 임대옥(林黛玉)이 어려서 나두화상(癩頭和尙)의 권고를 따라 일찌감치 출가했더라면 나중에 요절(夭折)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녀의 병도 발작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랬으면 홍루몽에는 병서시(病西施)같이 감성이 풍부하고 우수(憂愁)에 젖어있으며 울기 좋아하고 화내기 좋아하는 임매매(林妹妹)는 없었을 것이며 묘옥(妙玉, 홍루몽에 나오는 여승)은 두 명이 되었을 것이다. 묘옥(妙玉)에게서는 대옥의 가능성이 내비친다. 만일 대옥이 삭발(削髮)하여 비구니가 되었다면 묘옥처럼 고요한 마음(心如止水)을 지닐 수 있었을까? 그저 대옥은 고요한 마음을 가지지 못했고 보가가(寶哥哥, 가보옥)의 그림자에 의하여 더 많은 파장(波長)이 일어났다. 아름다..
젊은이들이 읽으면 쉽게 타락할 수 있다고 보는 ‘홍루몽’은 정말 청춘문학인가 대만작가 장훈(蔣勛)은 '홍루몽'이 청춘문학이라고 했다. 신판 '홍루몽(紅樓夢)' 드라마의 제작자(製作者)들도 이렇게 생각하고 있다. 그러므로 신판 '홍루몽(紅樓夢)' 드라마에서 주요연기자는 대부분 미성년자로 청춘우상극(靑春偶像劇)의 노선을 가고 있다. 그들의 부모(父母)는 완전히 할아버지, 할머니의 모습이다. 아마도 이들 조연(助演)을 통하여 주요배역의 '청춘(靑春)'을 돋보이게 하기 위함일 것이다. 내가 알고 있는 친구(親舊)들 중에서도 이러한 견해(見解)를 여러 번 얘기한 사람이 있다. '홍루몽(紅樓夢)'은 청춘문학(靑春文學)이라는 것이다. 이 점은 과거의 '홍루몽(紅樓夢)'에 대한 평가와 약간은 다른 것 같다. 과거에는 ..
봉건제도 비극인물 대표자 임대옥(林黛玉) 유언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임대옥(林黛玉)이 가부(賈府)에 들어온 날에서 바로 훌쩍 뛰어 마지막 날로 가보자. '바로가기' 버튼을 눌러서 제97회를 보자. 제목(題目)은 '임대옥분고단치정, 설보채출규성대례(林黛玉焚稿断痴情, 薛宝钗出闺成大礼)'이다. 보라. 남의 기쁜 날은 나의 슬픈 날이다. 제98회 '고강주혼귀이한천, 병신영루쇄상사지(苦绛珠魂归离恨天 病神瑛泪洒相思地)'에서 임대옥(林黛玉)은 임종유언으로 두 마디를 남긴다. 앞뒤를 나눠서 살펴보자. 앞부분은 시녀인 자견(紫鵑)에게 말한 것이다. "동생! 나는 여기에 친인(親人)이 없다. 내 몸은 깨끗하다. 너는 어쨌든 그들에게 나를 돌려보내달라고 해달라!" 병으로 소상관(瀟湘館)에 누워 있던 임대옥(林黛玉)은 고향..
홍학가들이 연구할 과제인 임대옥이 가부에 들어갈 때 몇 가지 이상한 점들 문예계(文藝界)에는 이런 말이 유행(流行)한다. "멋진 장면은 보통 뒤에 나온다고". 그렇다면 문예작품인 ‘홍루몽(紅樓夢)’의 "멋진 장면"은 가장 뒤에 나오는가? 필자는 하루 종일 생각을 해보았지만 제3회 임대옥(林黛玉)이 가부에 들어갈 때가 "멋진 장면"이라고.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 몇몇 주인공이 멋있게 등장(登場)하며 각각의 성격특징을 잘 드러내주고 그들의 이후 각자운명에 대하여 최종판결(最終判決)을 내려준다. 둘째, 임대옥(林黛玉)의 시각과 마음속 생각을 통하여 곧 몰락(沒落)할 호족의 마지막 변화를 생생하게 보여준다. 당연히 이는 홍학가(紅學家)들이 연구할 과제이다. 조설근(曹雪芹)이 그렇게 쓴 것은 역사적 원인이 ..
논쟁이 끊이지 않은 조설근이 홍루몽을 썼다는 것을 의심 받는 6가지 이유 왜 '홍루몽(紅樓夢)'과 같은 위대한 작품의 작가(作家)가 누구인지를 문제(問題)로 삼을까? 첫째, 후세의 독자(讀者)들의 "믿기 어렵다"는 심리이다. 하루살이는 계절을 모른다. 범인은 천재(天才)의 재능과 학식을 이해할 수 없다. 특별히 위대한 작품의 앞에서 후세의 독자들은 쉽게 이런 의문(疑問)을 품게 될 것이다. 이것이 정말 그(그녀)가 쓴 작품이란 말인가? 그(그녀)가 어찌 이렇게 위대한 작품을 써낼 수 있단 말인가. 이런 유(類)의 의문은 중국의 특유한 것이 아니다. 외국에도 있다. 예를 들어 세익스피어의 이름으로 수많은 유명한 희극작품(喜劇作品)이 있다. 이것도 의심을 받는다. 그들은 말한다. 강호의 연극단 주인이 어찌 ..
홍루몽 저술한 조설근 마지막 거처는 어디이며 마지막 거주지에 대한 6가지 학설 지금까지 조설근(曹雪芹)의 마지막 거주지(居住地)에 대하여는 최소한 아래의 6가지 학설(學說)이 있다. 1. 육랑장 바깥의 소관제묘; 2. 서교 건예영; 3. 홍산구에서 온천진으로 가는 길의 상황기영 부근; 4. 남신장 행석구, 열무루와 보승사의 사이; 5. 온천진 백가동촌, 소석교 부근; 6. 정백기촌 38호, 북경식물원내, 지금의 "조설근기념관" 소재지 6가지 학설의 근거는 기본적으로 추측에 민간전설(民間傳說)을 더한 것이다. 추측은 각각 일정한 근거가 있다. 다만 이들 근거는 명확하게 구체적(具體的)인 마을이름, 지명 혹은 방위거리를 묘사한 것이 없다. 돈성(敦誠), 돈민(敦敏), 장의천 등 생전의 가까운 친구들은 조설근..
방대한 독자층 형성한 최고성취 대표한 홍루몽 중국 제일명저로 통칭된 계기 "사대명저(四大名著)"는 오늘날 중국인들에게는 귀에 딱지가 앉을 정도로 들은 말이다. ‘삼국연의(三國演義)’, ‘수호전(水滸傳)’, ‘서유기(西遊記)’, ‘홍루몽(紅樓夢; 책이 만들어진 순서)’의 이 4권의 거작은 중국백성들이 가장 잘 알고 있는 소설이며 방대(尨大)한 독자층을 형성하고 있을 뿐 아니라 중국고전소설의 최고성취를 대표한다. 단 이 4부의 위대한 작품은 언제부터 "사대명저"로 통칭(統稱)되었는가? 아마도 이것은 모두 아는 바가 아닐 것이다. 근원을 따져보면 명나라 때 소설가 풍몽룡(馮夢龍)이 "사대기서(四大奇書)"라는 말을 한 것이 "사대명저(四大名著)"의 남상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어떤 학자들에 의하여 명나라 ..
중국 4대 명저 통행본인 홍루몽과 수호전의 첫 부분에 대한 10가지 대조비교 홍루몽(紅樓夢)과 수호전(水滸傳)은 첫 부분이 10가지 점에서 놀랍도록 닮았다. 홍루몽과 수호전은 모두 중국의 4대 명저에 들어가고 세상에 전해지는 판본이 비교적 많다. 연구자는 이번에 이런저런 판본(板本)은 모두 놔두고 그저 통행본(通行本)인 (124회본) 홍루몽과 통행본 (100회본) 수호전의 첫 부분에 대한 대조비교를 해보기로 한다. 정확히 말하면 홍루몽은 임대옥(林黛玉)이 가부에 들어오기 전까지는 모두 첫 부분의 범주에 속하는 것으로 보았고 수호전에서는 사진이 노달(나중의 魯智深)을 만나기 전까지를 첫 부분의 범주로 보았다. 연구자가 자세히 읽어본 결과 ‘홍루몽’과 ‘수호전’은 첫 부분에서 10가지나 놀랍게도 닮은 점이 ..
강희제의 넷째 아들이며 효공인황후 우야씨의 소생인 청나라 제5대 황제 옹정제 청나라 제5대 황제이다. 강희제(康熙帝)의 넷째 아들로 청의 전성기(全盛期)를 이끌었다. 중국 역사에서 제갈량(諸葛亮)과 쌍벽을 이룰법한 지독한 일 중독자(中毒者)이다. 다만 성격은 상반되는 게 함정 강희제(康熙帝)의 치세가 워낙 길었기 때문에 1722년 즉위했을 때 이미 45세였으며 그 후 13년 동안 재위했다. 강희제 17년인 1678년 12월 13일, 강희제의 4남으로 후궁 우야씨(烏雅氏)가 자금성에서 그를 낳았다. 당시 우야씨는 서비(庶妃)로 옹정제를 기를 수 없었다. 이 시기에 황귀비이자 내궁을 관리하던 동가씨(佟佳氏)의 유일한 자녀가 요절했는데 강희제는 그녀에게 옹정제를 양자로 줘 버렸다. 동가씨는 옹정제(雍正帝)를 ..
일명 석두기라 불리는 홍루몽 작자는 누구이며 홍루몽은 왜 겨우 80회뿐인가? 홍루몽(紅樓夢)의 작자는 누구인가? 2,3백 년 동안 여러 가지 설이 많이 나와서 하나로 모여지지 못했다. 청나라 때의 유서(裕瑞)는 ‘조창한필(棗窓閑筆)’에서 이렇게 말했다. 듣기로 ‘풍월보감(風月寶鑑)’이라는 책은 ‘석두기(石頭記)’라고도 하는데 "누가 썼는지 모른다." 조설근이 그것을 삭제하고 고치고 윤색(潤色)했으며 그의 숙부인 지연재(脂硯齋)가 비주(批注)를 달았으며 이름을 ‘홍루몽’으로 고쳤다. 그는 초본(抄本)을 본 바 있다. 정위원(程偉元)은 소주 사람으로 출판상(出版商)이다. 일찌기 세 번 ‘홍루몽’을 인쇄 출판한다. 그가 출판한 ‘홍루몽’ 정갑본(程甲本), 정을본(程乙本)의 각본의 서문에서 그는 이렇게 말한다...
홍루몽 소저들 중 임대옥이 가장 아름답고 아환들 중에서는 청문이 가장 아름답다 홍루몽의 여자들 중에서 누가 가장 예쁠까? 홍루몽에는 많은 여자들이 나오고 재모(才貌)가 출중하다. 다만 작자는 미모를 묘사하면서 공필(工筆)과 사의(寫意)를 서로 결합시켜서 자주 구상을 추상화(抽象化)하고 형체를 영동화(靈動化)히며 환경을 의상화(意象化)하여 독자들에게 상상의 공간을 충분히 남겨주었다. 임대옥(林黛玉)의 용모는 당연히 아주 뛰어날 것이다. 그러나 책을 다 뒤져보아도 대옥의 용모가 어떤지 구체적(具體的)인 묘사를 찾아볼 수가 없다. 심지어 얼굴이 긴 편인지 둥근 편인지 눈이 큰 편인지 작은 편인지 키가 큰 편인지 작은 편인지 피부가 흰 편인지 검은 편인지도 언급(言及)이 없다. 그저 제3회에서 가부(賈府)로 들..
홍루몽에 나오는 EQ가 높은 여인들 모두 말 예쁘게 하는 특징 갖췄다고 평가 홍루몽(紅樓夢)의 EQ가 높은 여인은 모두 이런 특징(特徵)이 있다. 홍루몽에 이런 유명한 대련(對聯)이 있다. "세사동명개학문(世事洞明皆學問), 인정연달즉문장(人情練達卽文章)" 뛰어난 홍루몽의 여자들 중에는 생활의 지혜(智慧)가 뛰어난 여자들이 많다. 어떤 사람은 설보채(薛寶釵)의 팔면영롱(八面玲瓏)을 좋아하고 어떤 사람은 봉저(鳳姐, 王熙鳳)의 풍풍화화(風風火火)를 좋아한다. 그리고 적지 않은 사람들은 평아(平兒)를 책에서의 "EQ 제일인"으로 꼽는다. 확실히 평아(平兒)에게는 EQ가 높은 여인에게서 볼 수 있는 특징들이 있다. 우리가 그 중 한두 개를 배운다면 평생(平生)을 잘 써먹을 수 있을 것이다. '말을 예쁘게 잘 하..
번역자나 필사 연대 등은 책 속에 밝혀져 있지 않은 홍루몽 고전산문작품 구성 및 형식 : 120권 117책(권24, 54, 71 유실)의 필사본이다. 중국 청(淸)나라 건륭(乾隆) 때의 소설 ‘홍루몽(紅樓夢)’ 120회(前 80회는 曹雪芹 작, 後 40회는 高鶚의 續作이라고 전함)를 완역한 것이다. 현재는 그 중 3권이 없어지고 117책이 남아 있다. 책의 크기는 28.3㎝×18.2cm이다. 표지(表紙)에 ‘홍루몽’이란 제목과 회목(回目)을 쓴 별지를 붙이고 본문 상단에 주필(主筆)로 원문을 싣고 옆에 한글로 중국어 발음을 표기(表記)했으며 하단에는 우리말 번역을 수록(蒐錄)했다. 1면은 8행이며 1행은 18자 내외로 가지런하다. 회목과 시사(詩詞)의 경우에는 두 칸을 내려썼다. 원문(原文)도 8행이지만..
치열한 논쟁 속에서 '홍루몽'의 작자가 누구인지를 고증한 중국의 문학자 호적 모든 책에는 작자(作者)가 있다. 그러나 어떤 작자는 실명(實名)을 드러내기 실어서 가명(假名)을 쓴다. 그리하여 어떤 책은 작자가 누구인지에 대한 논쟁(論爭)이 끊이지 않는다. '금병매(金甁梅)'의 작자는 '난릉소소생(蘭陵笑笑生)'이다. 이 이름은 보기에도 가명인 것을 알 수 있다. 작자가 도대체 누구일까에 대하여는 지금까지도 논쟁이 끊이지 않는다. ‘홍루몽(紅樓夢)’에서는 "조설근(曹雪芹)"이라는 사람이 증산자(增刪者)로 되어 있다. 이 '조설근'은 우리가 평상시에 짓는 이름과 방식(方式)이 같다. 그리하여 많은 사람들은 '조설근'을 실명이라고 본다. 신홍학(新紅學)의 기초를 닦은 인물인 호적(胡適)은 바로 그렇게 생각했다...
조설근은 조인의 손자라는 홍루몽작가에 대한 수수께끼 의문설의 문제점 '홍루몽(紅樓夢)'의 원작자가 누구일까? 현재 갈수록 많은 연구자들은 호적(胡適)이 고증한 "홍루몽의 작자는 조설근(曹雪芹)이다"라는데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호적의 ‘홍루몽고증’에서는 홍루몽의 작자가 조인(曹寅)의 손자인 조설근(曹雪芹)이라고 본다. 현재의 홍학가(紅學家)들은 보편적으로 조설근이 조옹(曹顒)의 유복자로 약 1715년경에 태어났다고 본다. 그런 조씨 족보(族譜)에는 조옹의 아들을 조천우(曹天佑)라고 적었고 조설근이라고 적지 않았다. 그는 관직이 주동(州同)에 이르러 '모연봉유(茅椽蓬牖), 와조승상(瓦竈繩床)", "거가식죽주상사(擧家食粥酒常賒)"할 정도로 가난하지 않았다. 비록 이 '조설근(曹雪芹)'은 일부 청나라사람들의 ..
매사가 고증하기를 홍루몽 전반은 효렴공 썼고 후반은 조설근 완성했다고 주장 호문빈(胡文彬) 선생의 '부상담홍류유고(扶桑談紅榴遺稿) - 황준헌(黃遵憲)과 일본우인의 홍루몽필담(紅樓夢筆談)'이라는 글에서 청나라 광서4년 무인년(1878년) 중국근대의 저명한 학자이자 대시인이며 당시 일본대사관 참찬으로 있던 황준헌(黃遵憲)이 대사관직원인 매사(梅史), 칠원(漆園), 추선(樞仙) 등을 데리고 일본우인과 홍루몽(紅樓夢) 및 그 작자에 관하여 필담(筆談)을 나누었다. 일본의 '대하내문서'에 기록(記錄)되어 있는데 거기에 이런 내용이 있다: 문: '홍루몽(紅樓夢)'이라는 책의 작자(作者)는 누구인가? 그가 쓴 것은 어느 시대(時代)를 가리키는가? 매사(梅史)가 답하다: 전반은 효렴공(孝廉公)이 썼고 후반은 조설근(曹..
청말문인 홍학계(紅學界)는 설보채보다 임대옥을 왜 좋게 보는가? 청말문인의 "채대지쟁(釵黛之爭)" 홍학계(紅學界)의 임대옥(林黛玉)과 설보채(薛寶釵)에 관한 평가문제를 되돌아보면 혹은 높이고 혹은 낮춘다. 기실 이것은 서로 다른 시대의 사회문화심리(社會文化心理)와 관련이 있다. 청나라 때 "채대지쟁(釵黛之爭)"이 일어난다. 처음에는 설보채를 높이는 사람들이 다수였다. 나중에는 임대옥의 지지율(支持率)이 점점 올라가서 청말 민초가 되면 임대옥이 압도적(壓倒的)인 우세를 보인다. 그 동안 문인의 논쟁(論爭)은 상당히 격렬(激烈)했다. 심지어 추도(鄒弢)와 허백겸(許伯謙)은 '채대지쟁(釵黛之爭)'으로 인하여 주먹질까지 하는 일이 벌어진다. 추도(鄒弢)와 허백겸은 모두 촉의 홍학연구자(紅學硏究者)이고 원래는 아..
중국 고전문학의 백미로 꼽히는 ‘홍루몽’의 새로운 비밀이 중국 대륙을 발칵 홍루몽(紅樓夢)고전산문작품 구성 및 형식 : 120권 117책(권24, 54, 71 유실). 필사본(筆寫本). 중국 청(淸)나라 건륭(乾隆) 때의 소설 ‘홍루몽(紅樓夢)’ 120회(前 80회는 조설근(曹雪芹) 작, 後 40회는 高鶚의 續作이라고 전함)를 완역(完譯)한 것이다. 현재는 그 중 3권이 없어지고 117책이 남아 있다. 책의 크기는 28.3㎝×18.2cm이다. 표지에 ‘홍루몽(紅樓夢)’이란 제목과 회목(回目)을 쓴 별지를 붙이고 본문 상단(本文上段)에 주필로 원문을 싣고 옆에 한글로 중국어 발음을 표기(表記)했으며 하단에는 우리말 번역을수록(蒐錄)했다. 1면은 8행이며, 1행은 18자 내외로 가지런하다. 회목(回目)과 시..
홍루몽 작가 조설근에 대한 홍학 고증연구와 홍루몽연구의 변천 조설근(曹雪芹)은 중국의 4대 명저 중의 하나로 불리우는 "홍루몽(紅樓夢)"의 위대한 작가이다. 이는 어린아이들도 다 알고 있는 상식에 속한다. 그런데 홍학(紅學) 고증파(考證派)의 시조격인 후스(胡適)의 이 결론에 대하여 학술계에는 이견(異見)이 계속하여 존재하여왔다. 고증파인 홍학가(紅學家)들이 계속하여 이러한 전제하에 고증을 계속하는 외에 많은 독자와 학자들은 홍루몽의 작가가 조설근인지에 대하여 회의적(懷疑的)인 입장을 보이고 있었다. 유평백(兪平伯) 선생은 홍루몽의 작가가 조설근이라는 설의 지지자(支持者)에서 회의자로 변한 사람 중의 하나이다. "홍루몽(紅樓夢)"의 책에 쓰여 있는 이야기와 조설근(曹雪芹)이라는 이름 및 고증파들이 고증하..
조조 팔호기와 오자양장, 원소 하북사정주, 유비 오호상장, 손권 강표십이호신 조조(曹操)에게는 "팔호기(八虎騎)"와 "오자양장(五子良將)"이 있고 원소(袁紹)에게는 "하북사정주(河北四庭柱)"가 있으며 유비(劉備)에게는 "오호상장(五虎上將)"이 있다. 그렇다면 손권(孫權)에게는 무엇이 있을까? 원래 손권에게도 "강표십이호신(江表十二虎臣)"이 있다. 강동십이호신(江東十二虎臣) 또는 동오십이호신(東吳十二虎臣), 혹은 강표지호신(江表之虎臣)은 오에서 활약(活躍)이 뛰어났던 열두 명의 장수를 가리키는 말이다. 이는 진수(陳遂)가 지은 정사 “삼국지(三國志)”의 오서 '정황한장주진동감능서반정전(程黃韓蔣周陳董甘陵徐潘丁傳)'에서 비롯한 말로 촉한(蜀漢)의 오호대장군(五虎大將軍), 조위(曹魏)의 오자양장(五子良將)과 같..
삼국지 인물사전 - 정봉(丁奉) 정봉(丁奉, ? ~ 271년)은 중국 삼국시대 오나라의 장수(將帥)이며 자는 승연(承淵)이다. 양주 여강군(廬江郡) 안풍현(安豊縣) 사람이다. 생애 젊어서부터 용맹으로 이름을 떨쳤다고 하나 자세한 활약(活躍)은 전하지 않는다. 손량(孫亮)이 즉위한 후 관동장군(冠東將軍)이 되었다. 정봉(丁奉)의 자는 승연(承淵)이고 여강(廬江)군 안풍(安豊)현 사람이다. 어려서부터 용감하여 소장(小將)이 되어 감녕(甘寧), 육손(陸遜), 반장(潘璋) 등에게 속했다. 수차례 정벌에 따라가 싸움마다 항상 군대의 으뜸이 되었다. 매번 적 장수를 베고 적의 깃발을 뽑았고 자신도 상처(傷處)를 입었다. 점차 승진하여 편장군(偏將軍)이 되었다. 234년 제갈량(諸葛亮)이 마지막 북벌을 위해 출정(出..
삼국지 인물사전 - 반장(潘璋) 반장(潘璋, ? ~ 234년)은 중국 삼국시대 오나라의 장수(將帥)로 자는 문규(文珪)이며 연주(兗州) 동군(東郡) 발간현(發干縣) 사람이다. 생애 손권(孫權)이 양선현의 장이 되었을 때 비로소 나가 손권을 따랐다. 손권은 그를 기이하게 여겨 아꼈고 그에게 병사를 모집(募集)하도록 하여 백여 명을 얻게 되자 부장으로 삼았다. 산월의 적을 토벌(討伐)하여 공로를 세웠으므로 별부사마(別部司馬)에 임명됐다. 이후에 오군의 큰 저자에서 침입자(侵入者)를 죽이자 이로부터 도적은 단절(斷切)되었다. 그는 이 일로 인해 이름이 났으며 예장군 서안현의 장으로 승진했다. 유표(劉表)가 형주에 있을 때 백성들은 여러 차례 그들의 침략을 당했다. 반장(潘璋)이 일을 맡은 이후부터 침략자들은 ..
삼국지 인물사전 - 서성(徐盛) 서성(徐盛)은 중국 후한 말 ~ 동오의 무장(武將)으로 자는 문향(文響)이며 서주(徐州) 낭야국(琅邪國) 거현(莒縣) 사람이다. 생애 전란(戰亂)을 피해 강동으로 이주했는데 손권(孫權)에게 등용되어 별부사마(別部司馬)가 된 후 병사 5백을 받고 시상장(柴桑長)으로서 황역(黃射)이 이끄는 수천 군사의 공격(攻擊)을 물리쳤다. 손권은 그의 공을 인정하여 교위(校尉), 무호령(蕪湖令)으로 임명했다. 또 임성 남쪽의 산월을 친 공로로 중랑장(中郞將)으로 임명되었다. 213년 1월 조조(曹操)가 유수구(濡須口)에 쳐들어왔을 때 폭풍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적군을 향해 돌격하여 손권(孫權)의 칭찬을 받았으며 221년 7월 유비(劉備)가 형주를 공격해 왔을 때 육의(陸議)의 지휘를 받으며..
삼국지 인물사전 - 능통(淩統) 능통(淩統, 189년 ~ 237년)은 후한 말, 중국 삼국시대 동오의 장군(將軍)이다. 자는 공적(公績)이다. 능조(淩操)의 아들이며 양주 오군 여항현 사람이다. 일생 아버지 능조(淩操)는 오나라의 손책(孫策)과 손권(孫權)을 2대에 걸쳐 섬겼다. 그런데 203년 능조가 황조(黃祖)를 공격하다가 날아오는 화살에 맞아 죽었다("삼국지"에서는 누구에게 죽었는지를 밝히지 않았으나, 위요의 "오서"에는 능조를 죽게 한 것이 감녕(甘寧)이라 했다). 당시 능통(淩統)은 15세였으나 주변 사람들이 능통을 칭찬했고 능조가 국사(國事)를 위해 죽었으므로 손권은 능통을 별부사마에 제수하고 파적도위를 겸임하여 아버지의 병사를 거느리게 했다. 손권(孫權)이 보둔과 마둔을 공격할 때 따라갔는데..
삼국지 인물사전 - 감녕(甘寧) 감녕(甘寧)은 중국 후한 말 ~ 삼국시대 오(吳)나라의 무장(武將)으로 자는 흥패(興覇)이며 익주(益州) 파군(巴郡) 임강현(臨江縣) 사람이다. 임강현은 오늘날 충칭시(重慶市) 중 현 지역이다. 생애 익주의 토호 : 선조는 원래 남양군 사람인데 파군(巴郡)으로 이주해 왔다고 한다. 처음에는 계연, 군승을 지냈으나 곧 관직(官職)을 버렸다. 젊은 시절부터 호협하여 동네 무뢰한(無賴漢)들을 이끌고 지역 자경단(自警團)과 같은 행동을 해 범죄사건 등이 일어나면 범인 체포(犯人逮捕)와 처벌을 행했다. 또한 조정의 관리라도 자신들을 존중(尊重)하고 후하게 대접하는 자와는 함께 즐기고 그렇지 않는 자에게는 부하들을 시켜 혼내주는 등 방약무인(傍若無人)으로 날뛰었다. 이런 행위를 20..
삼국지 인물사전 - 동습(董襲) 동습(董襲,? ~ 215년)은 중국 후한 말기의 무장(武將)으로 자는 원대(元代)이며 회계군(會稽郡) 여요현(餘姚縣) 사람이다. 생애 손책(孫策)이 원술의 허락을 받고 강동(江東)으로 진격하여 회계에 이르렀을 때 고천정(高遷亭)에서 손책을 맞이했고 손책의 눈에 들어 문하적조(門下賊曹)가 되었다. 손책이 산음(山陰)의 오래된 도둑 황룡라(黃龍羅)와 주발(周勃)을 쳤고 동습(董襲)은 손수 황룡라와 주발을 베어 별부사마(別部司馬)가 되어 병사 수천 명을 받았다. 동습은 오나라의 장수로 손책과 손권(孫權)을 섬겼으며 황조를 토벌하는 선봉(先鋒)에 섰다. 동습은 회계군 여요현 사람이다. 키는 8척이며 완력(腕力)이 다른 사람들을 능가했다. 동습(董襲)은 지조와 절개가 강개하고 굳세..